[칼럼] 그리운 금강산의 추억

기사승인 2020.05.24  23:01:24

공유

            [칼럼]  그리운 금강산의 추억

   
 
   
송 낙 환 /코리아데일리 논설실장, 관악신문 논설위원

금강산을 떠올려보면 1만2천 기기묘묘의 봉우리들 뿐 아니라 금강산 골짜기 곳곳에 새겨진 김일성의 항일 투쟁 관련 표지판들이 인상깊게 다가온다. 나는 이 금강산과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벌써 몇 년 전인가. 이미 그때의 일을 추억으로 느낄만큼 나는 성큼 나이를 먹었고, 세월이 말 그대로 물 흐르듯 흘러 반백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그 당시를 회고해 보고 있는 것이다. 인생사 모든 것이 꿈이요, 그것도 흐르는 꿈이어서 바다로 흘러가면 만사가 하나가 되고 마는데, 나는 당시에 금강산에 매달려 중국으로 평양으로 종횡무진 헤매고 다녔었다. 그 정열과 투지가 어디서 그렇게 샘솟듯 솟아나왔는지 지금도 생각해보면 그때에 나는 지칠줄 모르고 통일이라는 열망에 사로잡혀 그야말로 인생을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금강산 개발과 나의 인연

그러니까 그때가 어느때던가. 내가 정치를 한다고, 소위 이 땅에 독재를 타도하고 민의가 존중되는 나라, 말하자면 정의가 바로선 나라를 세우는데 일조를 해보겠다고 정치판에 뛰어들었다가 정치판의 저질 생리에 못견뎌 뛰쳐 나오고, 그 넘치는 정열을 주채 못하여 그것을 통일에로 방향을 틀었던 초기에 겪었던 일이다.

나는 당시에 통일을 하려면 지피지기면 백전백승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북한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찾아낸 북한 정부의 상당히 높은 분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주로 중국에서 만난 그 북한의 관리는 자기편을 비판적으로 말해도 말없이 들어주는 그런 사려깊은 상당히 수준높은 지식과 교양를 가진 분으로 기억된다. 특히 그에게서 받았던 강열한 민족사랑 정신은 나에게 인상깊게 자극적이었으며 그를 좋아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나면 민족의 현실과 민족의 미래, 통일 문제에 대해 밤늦은 줄 모르고 토론했고, 함께 고민하기도 했다.

어느날 그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머지 않아 북한의 금강산이 대외적으로 개방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당시까지만 해도 6.15 선언 이전으로 북한이 일부라도 개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긴가민가 의심되기도 했지만 그의 평소의 태도로 봐서 그의 말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을 때 그는 후속적으로 나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금강산을 개방하려면 자본가의 상당한 투자가 필요한데 북한이 그 투자자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 아는 자본가가 있으면 소개하라는 말까지 그는 덧붙였다. 나는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했다. 굳게 닫혔던 북한의 문이 금강산이라는 세계적 천연 명소에 의해서 비로서 열리기 시작하는구나.

당시 아직 어느 곳에서도 금강산 개방과 관련된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었고, 물론 언론 보도도 전혀 없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나는 이 정보를 손에 쥐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었다. 금강산 개방에 참여할 자본가를 찾기 위해서다.

삼성이나 현대와 같은 대기업도 있었지만 나는 그런 대기업보다는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참신하고 금강산을 개발할만한 재력을 갖춘 그리고 통일에의 의지가 있는 기업가를 찾아보고 싶었다. 백방으로 소문을 내어 수소문해 보던 중 지인의 소개로 한 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재미교포로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 자산가라고 소개되었다.

 

북측과의 회담과 개발합의

그와 수차례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의 민족애와 통일에의 열정이 확인되었다고 믿고 그를 북측에 소개하기로 마음 먹었다. 전문가를 찾아 금강산 일대를 개발할 개발 예정도를 포함한 개발 계획서도 만들었다. 상당히 두꺼운 책이었다. 이 계획서를 남북 양측 정부에 전달하고 중앙정부의 관계자도 만나 협의했다. 정부의 책임적 위치에 있는 간부와 그 재미교포 투자 의향 자산가와 만나 협의가 있은 후, 정부로부터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해 보라는 허가가 떨어졌고 나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북측에 이 사실을 알렸고 북측에서는 의향서 작성을 위한 회담을 하자고 제안해왔다. 북측과의 회담 날자가 정해지고 우리는 그 회담에 응할 준비에 여념이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연일 북측과 전화며 팩스 등으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나는 민족 분단사에서 획기적은 일을 하게 되었다는 자부심에 들떠 그야말로 지칠줄 모르고 동분서주 모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궂은 일조차도 도맡으며 이 사업의 성공을 위해 있는 힘들 다 바쳤다. 나 개인에게 이익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냥 북한이 대외적으로 개방되는데 내가 한 몫을 하게 되었다는 감동에 벅차 나는 나 자신을 송두리째 거기에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을까, 북측에서도 회담할 준비가 다 되었는지 희망하는 회담 날자를 통지해 왔다. 우리측에서도 북측이 원하는 날자에 회담을 하기로 결정하고 북측에 통보했다.장소는 베이징의 한 호텔, 북측에서는 장관급을 단장으로 5명의 대표단이 베이징으로 나왔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일사천리로 회담은 진행되어 3일만에 의향서 문장이 완성되었다.

우리측이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설계한 금강산 개발안을 대채로 수용하는 입장에서 협의되었으나 개발 내용은 차후로 북측에 의해 변경될 수 있고 우리측은 개발 내용보다는 자금 투자에 중점을 두는 방식으로 서로 합의하였다.

의향서가 작성되고 쌍방이 서명했다. 그렇게도 굳게 닫혔던 북한이 일부이긴 하지만 비로서 열리게 되는구나 하는 감회에 젖어 나는 몇일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도 열망하던 통일에의 길이 금강산 개방을 통해 열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나는 죽어도 좋다는 뜨거운 열정이 샘처럼 솟아 올랐다.

이 후로 나는 더욱 남북 문제에 몰두하게 되었고, 정치에서 다하지 못했던 열정을 남북 문제에 쏟아부으며 밤낮을 가지리 않고 뛰어다녔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 당시의 나는 너무 세상 경험이 부족하고 경륜이 모자라는 나이였다. 다만 한가지 민족과 통일 문제에 대한 열정만은 특별히 남달랐던 것 같다.

왜 그렇게 민족과 통일 문제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몰두할 수 있었을까? 그 요인이 무엇일까 지금 나이에서 냉철하게 당시를 분석해 보면 나는 명쾌하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것이 내 운명이요 하늘이 나에게 지워준 사명이라고 생각도 해 보았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하늘이 해야할 일을 어깨에 짊어지워준다고 하지 않는가.

 

인생의 종착점은 어디인가요

그러나 그 일이 성사되는데 까지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나는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북측도 재미교포 투자자도 모두 속셈이 따로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추진 과정에서 점차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1차로 1백만 미달러를 북측에 송금하기로 쌍방이 합의하였고, 재미 투자자가 정해진 기한 내에 이를 북측에 송금하기로 한 것이다. 송금해야 할 날이 다가왔는데, 서울의 회사 통장에는 아직 입금이 안되어 있었다. 당시 이 일을 추진하면서 우리측의 대북 투자를 담당할 회사를 설립하여 그 회사 이름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금이 먼저 서울의 회사 측에 입금된 후 북으로 송금되는 절차를 밟아야 했던 것이다.

북측과 금강산 투자에 합의한 재미 투자자는 정해진 시간 안에 송금해 오지 않았다. 전화 통화에서 그는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못했다면서 내일 송금하겠다고 말해왔다. 기다렸다. 그러나 그 내일도 그는 송금해 오지 않았다. 또 내일로 미루었다. 이렇게 1주일이 지나갔다. 북측에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왔다.

통일운동 과정에서 그런대로 신임을 쌓아오며 북측과도 믿음으로 거래하던 내게도 타격이 왔다. 끝내 쌍방간에 좋지 못한 말이 오고가고 일은 틀어져 버렸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나는 지금도 잘 알지 못한다. 재미 자산가라는 사람은 명확한 설명이 없다. 그가 직접 참여한 협의에서 남한 정부 당국과 합의하였고, 정부 당국의 승인을 받은 상태에서 북한 당국자와 회담까지 열면서 합의한 의향을 깨뜨릴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다행이도 후일 정주영 회장의 희생적 결단에 힘입어 현대에 의해 금강산이 열리게 되고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을 우리 모두가 아는 일이다.

돌아보면 세상사 모두 헛된 것이다. 그렇게 뛰던 열정이 힘겨워질 나이가 되니 비로소 눈이 뜨인다. 모두 제 욕심에 딴 생각이 있었던 것 아닌가. 그 욕심, 그 재산 짊어지고 저승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티끌 하나도 가지고 갈 수가 없다. 백세인생이니 백이십세 인생이니 하지만 결국은 우리 인생의 종착점은 저승이다.

당시 이 사업을 추진하느라 사용했던 통장에는 아직도 빚이 걸려 있지만 이 또한 지나가는 인생의 한 단면일 뿐이다. 모두 내 과실이요, 내 운명이요, 순간에 지나가는 인생일 뿐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케이디·코리아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ad36

인기기사

포토

1 2 3
set_P1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bottom
ad26
ad27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