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의 명곡, 박재란 삶과 인새의 그림자 조명 아름다운 외모와 꾀꼬리 같은 목소리 주인공 박재란

[코리아데일리 이경미 기자]

아름다운 외모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한국 가요계를 이끌어온 박재란 감동의 삶이 네티즌드르이 주목을 끌고 있다.

가수 박재란(본명 이영숙)은 가수 겸 작사가이며 영화배우로 봄이며 어김없이 불려지는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는 지금로 여전히 봄의 희망을 전해주고 있지만 앞으로로 계속해서 ‘불후의 명곡’으로 남아 있을 가요계 급자탑이다.

한국 가요계와 함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있는 박재란은 1957년 정식 데뷔해 2015년에도 히트집을 낼 정도로 큰 사랑을 받은 대한민국 원로 가수이다. 히트 곡으로는 ‘뜰 아래 귀뚜라미’, ‘러키 모닝’, ‘코스모스 사랑’, ‘밀짚 모자 목장 아가씨’ 등이 있다.

▲ 가수 박재란 씨의 현재 모습과 리즈 시절의 박재란 씨 (사진 코리아데일리 DB)

최근에 코리아데일리와 전화 통화에서 “예전에 활동할 당시에는 마음을 닫아놓고 도도하고 아주 교만했다. 누구하고 얘기도 잘 안했다. 그런데 지금은 나이도 있고, 신앙생활을 하니까 그렇게 편안하고 다 좋다”며 인생의 세 고비에 대해 말해 감동을 주기도 했다.

눈물 속에 감춰진 그녀의 삶은 ‘이혼’이라는 첫 고비가 그녀를 힘들게 했다.

박재란은 “이혼은 죽는 거나 마찬가지다. 낱낱이 얘기할 수 없다”며 이혼을 극복하고자 LA로 가게 된 사연을 전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감옥에 가는 등 어려움을 겪었고 .그리고 미국에서 건강에 위기를 겪으며 두 번째 고비를 맞았다.

그러나 이를 넘어선 박재란은 “이제는 호흡을 하는 것 자체가 너무 감사하다. (하나님께서) 다 회복시켜주셨다. 믿음 있는 분들은 다 아실 거다”며 “고장 안 난 곳이 없었는데 다 치유 받았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현재가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다.

25일 KBS ‘불후의 명곡’을 통해 이제는 밝게 웃는 모습을 보이며 삶의 고비를 얘기한 박재란. 하지만 세 번째 고비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말을 잇지 못하고 만다. 바로 둘째 딸, 박성신이 세상을 떠난 것.

박재란은 “둘째를 가졌을 때 8개월 만에 조산을 해서, 장기가 다 약했다. 특히 심장이 너무 약했다. 병원에선 ‘이런 심장을 가지고 어떻게 노래가 되냐’고 했는데 그래도 둘째가 가수를 했다”며 “갑자기 심장마비로 하나님 곁으로 먼저 갔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치유를 받으려고 미국에 갔다. 이제는 많이 치유가 됐지만 하루도 생각이 안 나는 날이 없다. 정말 효녀였다”고 했다.

또 박재란은 “가수 안 되게 해달라고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 우리 딸 둘을 두고 눈물 흘리며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지 모른다. 그런데 결국엔 가수가 됐다”며 “팬 여러분 정말 죄송하다. 다시 태어난다면 연예인이 되고 싶지 않다. 가정주부로서 아기를 기르고 밥해서 먹이고 그렇게 살아봤으면 좋겠다. 그런 걸 못해봤다. 너무 부럽다”고 했다.

박재란의 현재의 갊은 더불어 사는 인생이다. 하나님을 영접하고 그때부터 치유도 다 받고 찬양으로 순회를 다니다보니 이십 몇 년이 지났다”며 행복한 나날을 전해주었다.

최근에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감사하고 기뻐하고 노력하고 조금 긴장하고 살면 젊게 살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며 새로운 노래에 도전해 꽃보다 이르다운 생을 살고 있다.

요즘은 ‘노래하는 전도사’라는 이름으로 권사가 된 박재란은 ‘주의 은혜라’라는 싱글 앨범을 발매했으며, 국내외 교회에서 찬양으로 아름다운 생을 전하고 있다.

한편 가수 박재란은 본관(관향)은 공주(公州)이며 서울에서 출생한 그녀는 이후 충청남도 천안에서 성장하였고 10세 시절이던 1947년에 부친상(父親喪)을 치렀으며 1953년 이영숙(李英淑) 본명으로 주한 미8군 무대 언더그라운드 라이브 클럽에서 가수 첫 데뷔를 하였다.

이후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 박태준(朴泰俊)에게 발탁되었으며 박태준을 사부(師父)로 모시고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 김광수를 사숙(師叔)으로 모시며 박태준의 문하에 음악 수련을 하며 박태준에게서 박재란(朴載蘭)이라는 예명을 얻어 1957년 정식 가수 데뷔하였고 이후 ‘뜰 아래 귀뚜라미’, ‘럭키 모닝’, ‘코스모스 사랑’, ‘밀짚 모자 목장 아가씨’ 등을 비롯한 노래들이 히트하였고 1년 후 1958년에는 파인 김동환의 시에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김동현이 작곡한 ‘산 너머 남촌에는’을 불러 연이은 히트 기록, 이듬해 1959년 영화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의 출연을 통하여 영화배우 데뷔했다.

이어 같은 해 1959년에는 당시 미국 가수 겸 기타리스트 및 작사가 겸 영화배우 벌 아이브스(Burl Ives)가 미국 시인 겸 라디오 MC였던 웨블리 에드워즈(Webley Edwards)와 공동으로 영어 가사로 작사하고 작곡 한 ‘Pearly shells’라는 노래 작품을 작사가 전우가 한국어 가사로써 번안 작사하고 박춘석이 편곡한 ‘진주 조개잡이’라는 노래를 받아 불렀는데 이 노래 작품은 국내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 여름 애창 노래 가운데 인기 애창 번안곡에 손꼽히는 노래가 되었다.

그녀의 둘째딸 박성신(1968년 11월 22일 ~ 2014년 8월 8일)은 1987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회상’이라는 노래 작품으로 첫 데뷔하여 1년 후 1988년 MBC 강변가요제에서 ‘비 오는 오후’라는 노래 작품으로 가창상을 수상하였고 이듬해 1989년 ‘한 번만 더’라는 노래 작품으로 공전 히트를 거둔 가수이지만 그녀를 가슴에 묻는 안타까운 죽음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있는 이 시대 영원한 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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